원서는 명대(明代)의 학자 원황(袁黃) 원료범(袁了凡.1533~1606) 선생이
자식을 훈계하기 위해 남긴 '요범사훈(了凡四訓)' 이며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수백년 동안 개운서(改運書)로서 널리 알려진 명저이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3
운곡 선사의 말씀이 이해가 안 되어 설명을 부탁드렸다.
그분은 보통 사람들은 망념과 비실재적 생각들이 그 마음을 영원히 차지하여
그들의 일생이 불가피하게 운명의 수학에 구속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운명이 존재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나,
오직 보통 사람만이 이에 구속된다.
운명은 지극히 착한 일을 한 사람이나 지극히 나쁜 짓을 한 사람을 구속할 수 없다.
나는 공 선생이 예언한 대로 살아왔고 내 인생을 바꿔 보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의 운명에 구속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전형적인 보통 사람이었던 것이다.
놀란 나머지 나는 운곡 선사에게 우리가 스스로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분은 대답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행복하게 살 수 있소.
이것은 진실한 가르침이며
시경 (詩經)과 서경 (書經)에서 찾아볼 수 있소.
운곡 선사는 만일 사람이 망념이 없는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아직껏 운명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망념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운명의 지배를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범 선생은 망념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는가? 아니다.
그는 단지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아무것 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여태 망념들을 가졌다. 그는 여태 생각하였다: “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내 운명은 이미 예언되었고 나는 내 전 일생을 분명히 알고 있다.
” 아직 망념이 없는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 구속된다.
이 세상에 사는 보통 사람들은 깊은 선정 (禪定)에 이를 수 없다.
선의 조사(祖師)인 황벽(黃檗) 스님이 이런 깊은 선정에 있을 때,
그는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깨뜨릴 수 있었다.
이 때,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이 분명히 보였다.
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도 수학을 이용하여 미래를 추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과거, 현재, 미래를 볼 수는 없다.
미래를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는 깊은 선정이 요구된다.
이 상태는 소승불교에서 성인의 제 3단계인 아나함(阿那含)을 넘어선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운곡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운명이 보통사람들은 구속하지만,
수많은 선행을 쌓은 사람이나 극악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지배할 수 없음을 가르쳤다.
요범 선생은 공 선생의 예언에 20년 동안이나 묶여있었다.
그는 이 예언을 바꾸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고 따라서 실로 한 사람의 보통사람에 불과했다.
위대한 공덕을 쌓은 사람들은 정해진 운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를 바꾸었다.
이 원리는 극악한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어 이들의 운명도 또한 바뀌었다.
우리들은 요범 선생이 그의 일생이 예언과 완전히 들어맞았음으로
어떠한 지극한 선행이나 악행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운명이 변화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것을 피할 수 있을까?
그렇다. 피하는 것은 초월하는 것이다.
정수(定數)들 안에 변수 (變數)들이 있는데,
공 선생은 이 변수들을 몰랐거나
아니면 이를 계산할 줄 몰라, 단지 정수들만 예측한 것이다.
이 변수들은 우리들이 조정할 수 있으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운명을 개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행운을 찾을 수 있다.
선사를 만날 때까지 료범 선생은 이 변수들을 몰랐다.
선사는 정수들이 존재해 미래가 계산될 수 있음을 믿었을까? 그렇다.
“ 사람이 망념이 없는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그는 운명에 구속된다.
” 운곡 선사는 미리 운명이 정해짐의 실재성을 완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는 미리 운명이 정해짐에 관한 것이 아니고 운명을 개조함에 관한 것이다.
오직 우리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서 이일을 이룰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어떤 다른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이일을 해 줄 수 없다.
“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개조하여 행운을 찾는다 ”
요범 선생이 학자임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알았고,
따라서 선사는 그를 깨우치기 위하여
시경 (詩經)과 서경 (書經)에서 그 원리들을 인용하였다.
운곡 선사는 이 가르침들을 이해했고,
중요하고 진실임을 확인해 주었다.
불교의 가르침에 우리가 부귀 (富貴),
아들 딸 이나 장수(長壽)를 원하고 찾으면,
이를 얻을 수 있다고 쓰여 있소.
부처님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가장 큰 범계 (犯戒)의 하나라고 말씀 하셨음으로,
우리들은 부처님이나 보살님 들이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음을 믿을 수 있소.
불자로서 우리들은 부를 구하면 부를 얻고, 자식을 구하면 자식을 얻게 됨을 배운다.
비록 금생에 우리가 자식을 갖지 못할 팔자라도, 선행을 닦음으로 자식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요범 선생이 장수할 팔자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는 53세에 죽을 운명 이었다 ( 그러나 그는 74세 까지 살았다 ).
가르침에 따라 수행함으로서,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불교는 우리들로 하여금 운명에 속박되기 보다는 그것을 개조하도록 격려한다.
현존한 장가 (章嘉) 큰 스님은 말씀 하셨다:
“ 불교에서 우리의 모든 진실한 바람은 이루어진다.
” 그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므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원리와 방법을 이해하고, 이에 따라 무언가를 구하면,
우리의 진실한 바람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
만일 우리가 가르침에 따르고도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업장 (業障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이 업장들을 말끔히 지워버리기만 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장가 큰 스님이 말씀 한데로 올바르게 구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일단 기본적인 원리들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들은 이 세상과 이를 초월하는 세계의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그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변화함을 알게 된다 ( 唯心所現, 唯識所變).
우리가 부처되기를 추구하면 부처가 된다.
하늘나라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면 하늘나라 사람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을 따른다.
화엄경에 “ 법계의 성품이 모두 마음에 의하여 만들어 짐을 보라
(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 ” 라고 이르셨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방법은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이를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느냐 따라서 변화하는 원리에 부합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들은 합당하고 완벽하다.
만일 우리가 이 가르침에 따라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기를 구하면 이를 얻을 수 있을까? 물론이다.
이 경우, 운곡 선사는 요범 선생이 큰 야심 없이 단지 명예,
부귀만 구했음으로 이와 연관된 원리와 방법들만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운곡 선사는 그에게 거짓말이 불교에서 가장 나쁜 범계 (犯戒)의 하나임을 일러주었다.
네 가지 기본 계(戒) 즉 불살생, 불투도, 불망어, 불사음이 있다.
불망어가 이 계 중의 하나인데 어떻게 부처님이 우리를 속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선사가 우리가 자식, 부, 또는 장수 (長壽)를 구하여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을 때 이는 진실을 이야기 한 것이다.
우리는 요범 선생이 선사의 가르침을 엄격하게 실천하여
그가 구한 것들을 얻게 됨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선사께 맹자(孟子)가
무엇이든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구하는 것이 내 안에 있다 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내적인 성품 즉 도덕인의 (道德仁義)를 말한다.
이것들은 우리가 수행의 목표로 삼아야 할 모든 가치들이다.
그러나 만일 외부적인 요소들
즉 부귀, 명예 등에 이르면 우리가 이것들을 어떻게 구하여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선사는 맹자가 옳고, 단지 내가 그 뜻을 잘 못 이해했다고 말씀하셨다.
성인(聖人)이나 현인(賢人)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본래 지닌 성품을 향상하는 것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명예나 부귀를 구할 것인가?
비록 이것 들이 외부적 혜택일지라도 구하여 얻을 수 있다.
만일 이것 들은 운명 지워진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구해도 소용없는 짓으로 보일지 모른다.
이것이 운명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로서 미리 결정된 상수 (常數)로 보는 것이다 (宿命論).
이 상수는 우리가 전생들에서 만든 원인이고,
그 결과는 우리가 금생에서 받는 것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상수들 속에 변수 (變數) 들이 있고,
변수들이 추가되면 결과가 바뀌게 됨을 모르고 있다.
부귀와 명예는 분명히 얻을 수 있다.
운곡 선사는 선종의 6조인 혜능(慧能) 대사께서 ” 모든 복전 (福田 )은 우리의 가슴 속에 있다.
만일 사람이 내부의 참 마음으로부터 구하면
원하는 모든 것과 통할 수 있다 “ 라고 가르쳤다고 말씀했다.
우리의 내부에서 찾음으로서 우리는
비단 내적인 덕성인 도덕인의(道德仁義)등을 얻을 뿐만 아니라,
(외적인 혜택인 ) 부귀, 명예 등을 얻게 된다.
내적인 덕성과 외적인 혜택을 같이 얻을 수 있음은 참으로 귀중하다.
우리가 어떤 것 즉 우리 밖의 물질이나 우리 안의 덕성을 얻고자 할 때,
우리 안에서 즉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밖에서 찾아 봤자 소용없다.
왜냐하면 외부적 요소는 상수임으로 변할 수 없다.
마음은 변수임으로 변할 수 있다.
20년 동안 보통사람들에 비하여 요범 선생의 마음은 청정했다.
변수들을 몰랐음으로 그의 마음은 상수들과 완전히 부합하였고,
그의 일생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예언한대로 전개되었다.
운곡 선사는 찾는 것이 우리 안에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도덕인의(道德仁義)는 내부에 있고 공덕의 수행이다.
명예와 부귀는 외부에 있고 인생의 즐거움이다.
이 두 가지 혜택을 입을 수 있음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화엄경에 설했듯이, “ 이치와 현상에 장애 없는 것 (理事無碍 ) ” 이 궁극적이고 완벽한 즐거움이다.
이것이야 말로 모든 일이 우리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져, 우리가 모든 일에 만족한 경우이다.
이것이 해탈이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비롭고 고귀한 모든 일을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불가사의한 결과들을 얻을 수 없다면,
수행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불교는 부정적이지도 않고 피동적이지도 않다.
아니 두드러지게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실용성에 관하여 이야기 한다.
그러나 불교는 무엇인가 확실히 성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실용적인 것이 없다.
우리가 그 혜택을 입으려면 불교의 중요성을 이해함이 긴요하다.
사실 사람들은 불교를 오해하여 그 혜택을 놓쳐 버렸다.
만일 우리가 그 혜택들을 체험할 수 있다면,
모든 가르침 중에서 불교가 가장 수승하고 심오하고 완전한 가르침임을 알게 될 것이다.
불교는 결코 시대에 뒤 떨어진 것이 아니다.
불교는 3천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적절하고,
동양이나 서양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합하다.
운곡 선사는 만일 사람이 안으로 자기 마음을 돌이켜 보지 않고
밖으로부터 맹목적으로 명예, 부, 장수 등을 구하면,
아무리 별 수단을 다 부려도 기껏해야 이미 운명 지워진 것들만 얻을 수 있다고 말씀했다.
밖으로부터 구하면 마음의 청정도 이미 받도록 운명 지워진 것도 다 잃어버릴 수 있어,
구하는 것이 무위로 끝나게 된다.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는다면 우리가 그것을 얻을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운명인 것을 얻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여하튼
우리가 가지도록 예정된 것을 갖게 되므로 그 시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주식시장에서 수백만불을 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단지 그들이 받도록 예정된 것을 받았을 뿐이다.
돈 벌 운명이 아닌 사람들은 주식시장에서 결국 돈을 잃게 된다.
누구나 다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도박에서 번 돈도 도박사가 벌게 예정되었던 것이다.
도둑까지도 훔친 것을 갖게 예정된 것이다.
만일 그가 훔친 것을 가질 운명이 아니었다면,
그는 도둑질에 실패했을 것이다.
( 만일 그가 훔치지 않았다면, 그 물건들은 다른 경로로 그에게 왔을 것이다 )
옛 사람들이 군자(君子)는 분수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인(小人)이 그러기 위한 노력은 가치가 없다.
왜냐? 각자가 상수인 그의 운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이치를 이해할 수 만 있다면,
우리는 모두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행복한 인생을 즐기며,
사회는 안정되고,
세계는 평화롭고,
더 이상 갈등이나 전쟁이 없을 것이다.
불교는 우리 인생에서 운명 지워지지 않은 것을 상수 밖에서 찾으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찾아서 얻는 것은 변수에서 온다.
어떻게 찾을 것인가?
안으로부터 이다.
우리는 아직껏 그 이치를 몰라 안으로부터 깨달음을 찾아 큰 공덕을 이룰 수 없었다.
우리들은 밖에서 찾고 있었다.
매일 계책을 꾸미고 노력하면서.
그러나 우리는 올바른 길을 따라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방법, 계획, 수단을 가진다 해도
단지 우리가 단지 얻도록 운명 지워진 것들만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우리가 얻은 모든 것들은 운명 지워졌고, 우리들의 상수들이다.
요범 선생은 이러한 상수들이 존재함을 알았으므로 걱정하거나 무리해서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운명을 알았다.
그는 어떤 망상(妄想)을 일으키거나 어떤 수단을 써도
그것이 예정된 것이 아니면 실패할 것임을 알았다.
밖에서 찾으면, 우리의 마음이 더렵혀져 전적으로 당황하게 되고
단지 우리가 갖도록 운명 지워진 것 들만을 갖게 된다.
이렇게 해서 구하는 것이 좌절될 때, 우리 마음이 어찌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20년 동안, 요범 선생은 공 선생의 예언만 따랐다.
그는 청정한 마음과 만족한 상태를 유지해 왔다.
그는 모든 것이 운명 지워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어떤 것을 구하려는 바람이 없었다.
밖에서 무엇인가 찾으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과 경험이 요범 선생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은 불안정한 마음으로 고통스러운 일생을 마친다.
그들이 무엇을 얻을지라도,
그것들은 얻도록 예정된 것들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슬프게도 안과 밖 모두에서 잃어 버린다.
♩..心想曲 이뭐꼬(What is the E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