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스크랩] 운명을 바꾸는 공부 / 11

운재 2010. 2. 4. 01:42

원문저서 명대(明代)의 학자 원황(袁黃) 원료범(袁了凡.1533~1606) 선생이
            자식을 훈계하기 위해 남긴 '요범사훈(了凡四訓)'....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수백년 동안 개운서(改運書)로서 널리 알려진 명저이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11

내 이름은 본래 “ 넓게 배우다 ”는 뜻의 학해 (學海)였다.
그러나 운곡 선사로부터 이 가르침을 배운 후
이름을 “ 평범(平凡)함을 초월하다 ”는 뜻인 요범(了凡)으로 바꾸었다.

과거에 중국 사람들은 3 벌의 이름을 가졌다
즉 공식적인 이름(名)과 예의적인 이름(字) 그리고 가장한 이름(號)이다.
공식적인 이름은 부모가 자식들에 대한 희망을 담아 지워 준 이름이다.
이 이름을 바꾸는 것은 이 희망을 저버리는 것과 같아 진실로 불효한 행동이다.

 
남자가 20세 그리고 여자가 16세에 이르러 성인이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이 공식적인 이름들로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르는 것이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이 때 그들은 성인이 되는 의식(冠禮)을 갖는다.
이 의식에서 동년배나 더 나이 많은 형제나 같이 공부하는 친구나
그냥 친구가 예의적인 이름을 지어주고 이 이름을 나머지 평생토록 쓴다.
훗날 어떤 사람이 관리나 또는 비록 황제가 된다 해도 사람들은 그를 이 예의적인 이름(字)으로 부른다.
만일 어떤 성인(成人)이 공식적인 이름(名)으로 불린다면
아마 틀림없이 그가 범죄를 저질러 구형받아 처벌되는 경우일 것이다.
더욱 존경해야할 경우에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가장한 이름(號)
또는 그가 태어난 지명(地名)으로 부른다.
이것은 그가 어떤 특정한 곳 출신인 매우 존경받는 중요한 인물임을 가리킨다.
요범과 학해는 요범 선생의 가장한 이름들이다.
오직 부모와 스승만이 어떤 사람이 성인이 된 후에도 공식적인 이름으로 부르고,
조부모나 삼촌이나 황제까지도 예의적인 이름으로 부른다. 이리하여,
사회가 스승에게도 그 부모와 동등한 감사와 존경을 부여했다.

이것은 내가 우리가 우리 운명을 재창조할 수 있음을 알고,
운명에 지배받는 다른 범인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생각하거나 행하는 일은 무엇이건 매우 조심하기 시작했다.
곧, 나는 예전과 사뭇 달라짐을 느꼈다.
이전에는 나는 조심성이 없었고 자제할 줄 몰랐다.
지금, 나는 내가 자연스레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되었음을 발견한다.

이 부분은 요범 선생이
그의 잘못들을 고치도록 수행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는 결심을 이야기 한다.
먼저, 그는 그의 가장한 이름을 학해에서 요범으로 고쳤다.
“ 요(了)” 는 이해와 각성을 의미한다. “ 범(凡) ”은 범인임을 의미한다.
요범은 세상일을 이해하고 우리가 우리 운명을 재창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시점에서, 그는 세상 모든 일을 이해했고 깨달았다.
그는 진실로 오직 개인만이 스스로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원리와 방법을 이해했고,
그때부터 그의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그가 개심(改心)하기로 결심한 후, 모든 것에 대한 그의 감각이 변했다.
그 때부터 그가 인생을 마칠 때가지 줄곧 그는 끊임없이 그의 생각과 행동을 의식했고,
항상 방심하지 않았고, 더 이상 미혹되지 않았다.
이전에는 자제할 줄 몰랐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했고, 날마다 목적 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는 그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 왔던가? 그는 방향도 목표도 없었으므로 어떤 생각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살면 운명에 구속되고, 밝은 미래를 재창조 할 수 없게 된다.
개심한 후, 그는 자신이 생각, 말 그리고 행동에서 자연스레 조심스러워 지고 주의 깊어짐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고친 후 인생과 우주에 관한 그의 믿음과 견해가 극적으로 변했다.
이전에는 그는 모든 것이 운명에 구속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운명을 재창조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단호하고 낙관적이 되었다.

나는 홀로 있을 때에도 이러한 태도를 견지한다.
왜냐하면 나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알 수 있는 하늘과 땅의 귀신들이 어디에나 존재함을 알기 때문에.
나는 내 생각 때문에 그들이 화내지 않도록 조심한다.
비록 나를 싫어하거나 중상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그들의 모욕을 인내와 평화로운 마음으로 견디고,
굳이 그들과 다투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 개심할 수 없는 것은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량수경에 더 정통한 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의 생각,
말과 행동에서 요범 선생보다 더 조심스러워 질 수 있다.
정토(淨土)의 인구는 수로 셀 수 없다.
비록 우리가 이 세계의 모든 컴퓨터를 동원해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계산할 수 없다.
이들 각자는 모두 아미타 부처님과 같은 능력을 가진다.
모두 모든 것을 보는 천안(天眼)과 모든 것을 듣는 천이(天耳)를 가지며
온 우주 모든 존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생각을 아는 능력을 갖는다.
이래서 아미타 부처님, 대자비보살, 대세지보살과 정토의 모든 존재들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나쁜 짓을 안다.

비록 우리가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는 곳에 홀로 있어도
우리는 스스로 자제하고 단 하나의 삿된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진실로 자기 훈련과 제어를 이룰 수 있다.
정토 수행자로서 우리는 정토왕생과 스스로 덕행(德行)의 성취를 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속인다면 우리는 성취할 수 없다.
공자는 고상한 사람은 홀로 있을 때도 조심한다(君子愼獨) 고 말했다.
홀로 살면서도 우리는 자신을 훈련하고 방종하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진실로 수행하게 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어떠한 실제적인 자제도 없이 끊임없이 방종 한다.
공공연히는 조심하고 자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제 멋대로 한다.

이것이 과거의 도량에 많은 수행자들이 한 방을 사용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만약 방 하나에 한 사람만 있다면 그는 수행에서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방에 10인 이상이 있으면 모두가 항상 바르게 처신한다.
이것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자기 훈련을 강요하는 것이다.
오늘 날 스스로 자제하려는 사람은 매우 적고 쾌락을 즐기는데 열중한다.
좋다! 우리는 이승에서 인생을 즐길 수 있고 깨달음의 길에서 성공하지 못한 탓으로
내생에도 또한 3악도(三惡道)에서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다!

큰 단체 안에서 살게 되면 모두 함께 일할 필요가 있다.
도량에 작은 독방(獨房)들이 몇 개 있지만 이것들은 특별히 연로한 수행자들의 몫이다.
또한 높은 지위에 있거나 주지나 또는 지도적 위치에 있어 많은 책임을 가진 스님들은 독방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함으로서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고 언제든지 일을 감독할 수 있다.
따라서 진실한 수행자는 6화(六和)의 하나인 “ 조화롭게 함께 사는 것 (身和同住) ”을 실행한다.
한 개인이 독방을 갖는 것은 부적절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두서너 사람이 한방에서 사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 나는 저 사람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아 ”라고 쉽게 생각할 것이다.
이러면 이 사람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끊임없이 아미타부처님을 염불(念佛功夫成片)하는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왜냐?
이들은 분별하고 청정하지 못한 마음 즉 불쾌함을 싫어하고 피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곳에서 청정하고 분별하지 않은 마음을 닦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같이 살거나 또는 사귀려고 하지 않는 것은 잘못 된 일이다.
요범 선생은 그 자신의 허물들을 찾아 진실하게 이를 고쳤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허물들을 다룰 때, 우리는 이들을 고치는 대신 끊임없이 자기변명을 하고 있다.
우리가 이러할 때,
우리가 어떻게 수행에 성공하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승단(僧團) 안에서 수행의 출발점은 단체 속에서 함께 살 때 따라야 할 기본 지침인 6화경(六和敬)이다.
모든 개인은 5계(五戒)와 10선(十善)을 지킬 수 있다.
과거에 도량에서는 사미률의(沙彌律儀)를 기준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10계(十戒)와 24문위의(二十四門威儀)를 포함한다.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까지 엄격할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재가 불자나 비구 비구니이건 5계와 10선을 기준으로 사용해도 충분하다.
그러나, 기준이 그 이하로 내려갈 수는 없다.

단체 속에서 조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6화경을 지켜
우리의 허물과 나쁜 버릇들을 고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요범 선생은 그를 싫어하거나 심지어는 중상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신경 안 쓰는 그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들의 모욕을 평화로운 마음으로 참을 수 있었고 더 이상 굳이 그들과 다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경박하고 참을성 없어 조그마한 불편이나 부당한 대우도 참을 수 없었던 전과는 달리 평온해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수행함으로서 개선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참다운 불교 수행자는 깨달은 존재이건 또는 악마나 귀신일지라도 상관하지 않고
누구하고라도 잘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들은 환경이나 상황에 무관하게 내면의 평화를 찾아 이에 머무를 필요가 있다.
선(禪)의 6조 혜능(慧能) 대사께서 깨달으신 후 사냥꾼들을 시중꾼 노릇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매일 그는 그들이 사냥하고 살생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고기를 대접하고 그들을 보살폈다.
사냥꾼들이 그의 주인이었고 그는 그들의 하인이었다.
그는 이 일을 짧은 기간이 아니고 무려 15년간 했다.
우리라면 이를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는 이를 견뎌냈을 뿐만 아니라 만족했고 어떠한 분별하는 망상이나 애착도 가지지 않았다.
이것이 15년 동안의 진정한 수행이다. 그는 중국 남부의 황매(黃梅)에 있었을 때 깨달음을 얻었다.
상황이 좋건 나쁘건 그는 청정한 마음, 평등한 마음, 대자비의 마음 , 그리고 친절한 마음을 닦아 나갔다.
우리의 수행에서 이 4가지 덕성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없고, 이들을 그가 닦았다.

오늘날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상황들에 관계할 때,
우리는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에서도 마음의 청정을 닦아나가는가?
만일 우리가 마음의 청정을 닦아나가지 못하면
우리는 올바르게 불교를 수행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혜택도 입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학문적 추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매일 경전들을 독송하고 이들을 매우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어도,
우리의 번뇌는 더욱 증대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3악도에 떨어지고 만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참된 수행자들은 문자(文字)들, 말해진 것(言說相), 이름 지어진 것(名字相),
또는 생각(心緣相)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직관(直觀)을 사용한다.
이들은 우리의 본성(本性)인 청정한 마음, 무분별의 진심(眞心)을 찾는다.
이들은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찾는다.

정토수행자인 우리들에게는 또한 청정하고 평등한 마음
즉 끊임없는 아미타불 염불(功夫成片)을 성취하는 것이 목표이다.
끊임없는 염불은 오염되지 않은 무분별의 마음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진심(眞心)에는 아무런 장애도 없다.
만일 우리가 아직 분별하는 생각과 집착을 갖고 있다면 끊임없는 염불을 이룰 수 없다.
이러한 분별심과 집착을 끊으면,
우리는 끊임없는 염불을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이 참된 수행이다.

내가 운곡 선사를 만난 그 다음해,
나는 공 선생이 3등하리라고 예언한 예부(禮部) 과거시험을 보았다.
놀랍게도, 나는 1등을 했다! 공 선생의 예언은 틀리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전혀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 하리라 예언했는데
그해 가을 나는 합격했다!

요범 선생은 시험에 3등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선행을 하고 공덕을 쌓음으로서 그는 그의 지위를 3등에서 1등으로 끌어 올렸다.
공 선생의 예언이 틀리기 시작하자 요범 선생은 그가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직접 보게 되었다.
그는 상수뿐만이 아니라 변수가 있음을 직접 보았다.
다음에,
그는 더 상위 시험에 합격하는 원을 세웠고 다시 그의 원은 이루어 졌다.
우리가 가질 수 없도록 운명 지워진 것을 얻는 것이 진실로 구하여 얻은 것이다.

비록 내가 많은 허물들은 고쳤지만,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성심으로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비록 내가 그 일들을 하였어도, 강요된 것이었고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마음 속으로 반성했고 아직도 많은 결점이 있음을 알아냈다.
예로서 선행을 해야 할 기회를 보고도
충분히 열성적이지 못 했던 것 또는 남을 도울 때 의심을 했던 것 등이다.


때로는 억지로 친절하게 행동하려고 했었으나,
내 말은 아직도 자제함이 없고 불쾌했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는 자제할 수 있었으나,
몇 잔 마시면 자제력을 잃고 행동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었다.
비록 내가 가끔 선행을 하고 공덕을 쌓기도 했지만,
내 허물과 잘못이 너무 많아서 내가 한 선행보다 더 무거운 것처럼 보였다.
많은 시간을 쓸데없이 그리고 가치 없이 낭비해 버렸다.

우리가 남을 도울 때 아무런 대가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에.
공자와 다른 성인들은 5 가지 인간의 관계 ( 五倫 )과 10 가지 도덕적 책임 ( 十義 )를 우리에게 가르쳤다.
전통적인 도덕적 원리에 의거한 5 가지 인간의 관계는
부부(夫婦), 부자(父子), 형제(兄弟) 친구 그리고 군신(君臣)간의 인간적 관계를 포함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우리 본성의 덕(性德)이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들을 보호하고, 사랑하고 교도(敎導)하는 것처럼 당연히 우리의 책임에 속한다.
자식으로서 우리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그분들을 명예롭게 하고 존경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에 속한다.
형제이거나 친구이거나 모두 서로 존경해야 한다.
친구로서는 서로 믿을 수 있고, 정직하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리고 도움이 되어야 한다.

요범 선생은 비록 아직 완전하고 청정하게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이해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동들이 아직도 개인적 이익 및 불이익과 섞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까 의심하게 되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청정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을 성심껏 도울 수 없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비록 선행을 한다 해도 아직 충분히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공자께서 “ 다른 사람들이 선을 이루도록 돕는 것 (成仁之美) ” 에 있는 공덕과 선이 공덕임을 가르치셨다.
우리가 남들이 선행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들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왜냐?
하나의 선행이 지역 사회 그리고 그 이상으로 전 사회에까지 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로서,
도로 하나를 수리할 필요가 있고 어떤 사람이 자원해서 이를 수리 하려고 나서면
우리는 그 사람이 그 일을 끝낼 수 있도록 열성적으로 도울 수 있다.
사회에 이익을 가져오는 이러한 종류의 일은 우리 모두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
요범 선생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동참은 할 수 있었지만 열성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조금만 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는 아직도 어려운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 의심했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많은 우리들은 우리가 그래야 하는지 회의적이다.
오늘날 사회에서 우리는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중 일부는 방탕 하는데 낭비하려고 돈을 요구하는 사기꾼들이다.
이러한 일이 생기면 우리의 선행이 나쁜 일이 된다.
따라서 선행을 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 하여는 자비와 함께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비는 남을 돕는 일의 배후에 있는 순수한 추진력이지만
지혜는 우리가 도와야 할지 말지를 조사하고 판단하는데 도움이 된다.

만일 그래야 한다면 우리는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우리를 속이려하고
또 우리가 그들이 하는 짓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교도할 필요가 있다.
만일 그들이 늙거나 병들지 않고 건강하고 일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살기 위하여 바르지 못한 수단을 쓰는 대신 올바른 일을 하도록 격려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우리의 허물을 고치는 일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시간과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시작 단계에서 어려움이 불가피하다.
말은 조심성도 없고 분별없이 하면서 행동만 예의바르게 하는 것은 나쁜 습관이다.
예로부터 말은 행운과 불행의 원인으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말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공자는 우리에게 네 가지 공부( 四科 )를 가르치셨다.

그중 첫째는 덕행(德行)이고 이것이 품위 있는 사람이 되는 기초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도덕교육이라 부른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그것에 관심이 적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교육은 우리 사회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공부는 언어이다.
공자는 우리가 사려 깊지 않아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않도록
언어를 적절히 그리고 공경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心想曲 이뭐꼬(What is the Ego)

 


......................나무본래자성불 - - -!!!

출처 : 선지봉 정사(宣智棒 精舍)
글쓴이 : 정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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