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스크랩] 운명을 바꾸는 공부 / 7

운재 2010. 2. 4. 01:45

원문출처 : 명대(明代)의 학자 원황(袁黃) 원료범(袁了凡.1533~1606) 선생이 
               자식을 훈계하기 위해 남긴 '요범사훈(了凡四訓)'....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수백년 동안 개운서(改運書)로서 널리 알려진 명저이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7

당신은 덕스럽고 관대한 마음을 닦고 다른 사람들을 선의와 자비심으로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은 또한 건강을 살피고 정력과 기백을 보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운곡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모든 나쁜 일들을 피하고 모든 착한 일들을 하여 공덕을 쌓으라고 격려했다.
이것이 불교와 세속적인 가르침에서 우리의 개선을 위한 기초가 된다.
만일 우리가 진지하게 악한 일들을 피하고 착한 일들을 하여 공덕을 쌓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천 금을 갖는 부자나 자손들이 일백 세대나
지속할 수 있는 충분한 공덕을 쌓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온 나라가 공자님을 존경한다.
전 세계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존경한다.
공자님은 세간(世間)의 큰 공덕을 쌓으셨고,
부처님은 출세간(出世間)의 큰 공덕을 쌓으셨다.

둘째로,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넓혀 타인에 관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하지 못하면,
우리는 더 많은 고통을 만나게 되고 이것이 우리 수행에 더 많은 장애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깨달음과 올바른 생각과 청정한 마음을 위해 수행한다.
만일 우리가 마음의 청정함을 얻지 못하면, 깨달을 수 없게 되고 결국 그릇된 생각을 갖게 된다.
올바르고 크게 깨달은 생각은 청정한 마음의 바탕위에 놓인다.
우리는 이것을 관대함으로 성취한다.
지나치게 심각하거나 모든 일에 비판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금강경(金剛經)에서 배우는 바와 같이,
“ 모든 현상은 꿈이고, 허깨비이고, 물거품이고 그림자이다 ”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
옛 사람들이 말했듯이, 모든 현상이 구름처럼 흘러간다.
화를 내거나 다툴 가치가 있는 일은 없다.
사물에 대하여 곱씹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것이 우리 마음을 청정하게 닦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온화하고 다정하고 태평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하지 못한 것이 요범 선생의 가장 큰 문제였다.
우리들은 모든 일과 모든 사람에 친절과 자비를 베풀도록 노력할 수 있다.
부처님은 이러한 것들에 차별이 없고 따라서 모든 것이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공자님 또한 “ 인자한 사람은 적이 없다 (仁者無敵)” 라고 인자함을 가르치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각에 거슬리는 것을 수용할 수 없다면,
우리는 친절하지도 자비롭지도 않은 것이다.
투쟁이란 인자한 가슴 속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대자비(大慈悲)이고, 우
리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이롭게 하기 위하여 배우고 수행해야 할 덕목이다.

정토경전(淨土經典)에서,
우리는 일심불란 ( 一心不亂 )을 읽게 된다.
이러한 상태는 대립하는 어떤 것이 존재하면 얻을 수 없다.
대립한다는 것은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혜능 선사는 “ 우리 마음은 본래 비어있다 ( 本來無一物 )” 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마음이 아직 단 하나의 망념(妄念)에 집착해도, 그것은 참된 마음이 아니고 허망한 마음이다.
청정하고 오염되지 않은 마음은 대립하는 생각들을 가질 수 없다.
대립하는 생각들이 더 이상 없을 때,
진심 (眞心 )이 드러나 마음이 청정해지고 우리가 일심불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일심불란과 끊임없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경지가 여기서 시작된다.
끊임없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경우, 처음엔 마음은 부처님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다.
수행이 오래 지속된 후에는 우리는 끊임없이 부처님을 생각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아미타불을 염불하고도 끊임없이 염불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이를 고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리의 장애들을 제거하였을 때,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 틀림없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
우리의 수행 정도와 무관하게,
그 경지에 이르렀을 때 알게 된다.
남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다.

우리가 끊임없이 염불하는 경지에 이르러 정토에 왕생하면,
성인과 범부가 함께 사는 나라 (凡聖同居土)에 왕생한다.
각성(覺醒)이 일심불란 (事一心不亂)한 경지에 이르면 모든 것이 일시적인 나라(方便有餘土)에 왕생한다.
깨달음이 일심불란(理一心不亂)한 경지에 이르면 우리는 진정한 보상의 나라 (實報莊嚴土)에 왕생한다.
우리가 이른 경지의 수준이 우리가 태어날 나라를 결정한다.
끊임없이 염불하는 경지에도 또한 다른 수준들이 있다.
따라서, 왕생의 9품(品)이 있다.
왕생의 상위 수준인 상3품(上三品) 태어나는 사람들은 스스로 원하는 시기에 열반할 수 있다.
그때에 이들은 아무 병도 없이 선채로 또는 앉은 채로 열반할 수 있다.
만일 이들이 아직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으면,
더 오래 머물 수 있다.
모든 것이 마음대로 이루어진다.
중3품(中三品)에 태어나는 사람은 몇 달 전에 열반할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또한 서거나 앉은 채로 열반할 수 있다.
하품(下品)에서는 며칠 전에 열반할 것을 알게 되나 임종 전에 아플 수도 있다.
일심불란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더욱 높은 능력들을 갖게 된다.
일심불란에는 2개의 수준이 있다.
즉 각성과 깨달음이다.
이 수준들은 우리 같은 범부들이 일생에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끊임없는 염불은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이생에서 우리들은 끊임없는 염불의 경지를 성취하여
우리가 원할 때 편안하게 열반할 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상3품(上三品)에, 성인과 범부가 함께 사는 나라(凡聖同居土)에 왕생하는 것이고,
우리의 남은 업을 지닌 채 왕생하는 것이다.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 정력과 기백을 보전해야한다고 말했다.
요범 선생이 저녁 내 앉아 있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건강을 돌볼 줄 몰랐기 때문에,
그는 건강과 정력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일이 어제로 다 소멸되었고,
아주 새로운 미래가 오늘 시작하는 것처럼 사세요.
만일 당신이 이럴 수만 있다면,
당신은 새로 태어난 유덕하고 진실한 사람이 될 것이요.

어제 일어난 모든 일 들은 과거에 속한다.
이것을 곱씹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이러지 못하면 이것은 마치 지난 일들을 다시 하거나 치룬 셈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알라야식 ( 阿賴耶識 )에 추가의 인상을 남긴다.
따라서 지나간 일들은 지나가도록 하고 잊어 버려야 한다.
중요한 일은 현재에 있는 일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의심과 후회는 번뇌가 되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슬픔과 고통의 조건이나 원인이 된다.

부처님은 과거를 곱씹지 말도록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우리들은 우(尤) 선생의 논평에서, 이것이 완전한 사람을 위해 운명을 바꾸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읽는다.
완전한 사람은 더 높은 수준의 지혜를 갖고 깨어있는 사람이다.
이를 성취하기 위한 6개의 단계가 있다
- 수행하여 공덕을 쌓아야 할 필요로부터 시작하여 정점에 이르러 갓 태어난 사람,
유덕하고 진실한 사람이 될 때까지-.
이것들이 운명을 바꾸는 열쇠가 된다.

우(尤) 선생은 그의 논평에서 말했다.
“ 운명을 바꾸는 첫 단계가 우리의 과오를 고치는 것이다.
쌓아진 모든 나쁜 습관들을 하나 씩 털어내고 모든 문제들의 뿌리를 하나 씩 뽑아내야 한다.
항상 어디에서나 우리의 모든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끊임없이 감시해야 한다.
우리는 자제하고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우리는 갓 태어난 어린애 같은 순결과 착함(善)을 지켜나간다.
” 우리 운명을 바꾸는 전적인 책임은 우리 손에 놓여 있는 것이지
하늘에 있는 존재나 깨달은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최상의 공덕을 지닌 사람은 더 이상 운명에 구속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자신에 대하여 엄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항상 우리를 용서해 준다면,
우리의 미래를 제한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에게는 가혹하고 엄격해야 하지만, 남에게는 너그럽고 관대해야 한다.
우리는 순수하고 유덕하고 순결한 사람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순결한 것인가?
그것은 아무런 이기적인 생각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끊임없이 망념을 갖게 된다면, 우
리는 순결하고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잃게 된다.

미리 결정된 것을 바꾸는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미래를 재창조하는 진리를 이해한다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더 이상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무엇이 일어날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알기위하여 주의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을 알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더 이상 속일 수 없다.
이전에 운곡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최상의 덕을 갖춘 사람들(極善之人)에 관하여 이야기 했다.
정토경전(淨土經典)에서 우리는 이들이 정토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최상의 덕을 갖춘 사람들은 참회하고 개심(改心)할 수 있다.
서방정토에서, 이들은 더 이상 고쳐야 할 것이 없을 때까지 매일 참회하고 개심(改心)한다.
그리고 그들은 부처가 된다.
최상의 수준에 있는 보살들(等覺菩薩))도 아직 과실(過失)을 가지고 있다.
어떤 과실인가?
이들은 아직도 깨뜨려야 할 한 등급의 무명 (無明)이 있다.
만일 등각보살들이 아직도 참회하고 개심해야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해야 할지 상상할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자비로운 가슴으로 참회하고 더 좋은 사람으로 변해야할 필요가 있다.
등각보살의 경지에 이르러도 우리는 이렇게 할 필요가 있다.
오직 고쳐야 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 우리는 부처가 된다.
우리에게 단 하나의 과실만 남아 있어도 우리는 최상의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

깨달음이란 우리의 허물들을 알고 이를 고치는 것이다.
보살들은 깨달은 중생들이다.
우리 또한 중생들이지만 우리들의 허물들을 몰라 이를 바로잡을 줄 모르기 때문에 깨닫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 나에게 어떤 허물이 있는가? ”라고 질문하고 오랫동안 생각해도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한다.
이래서, 보통 사람들은 허물이 없지만 보살들에겐 허물이 많이 있다고 말해진다.
그들은 자신에게 많은 결점이 있음을 알므로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 말, 행동 하나 하나를 감시하고
이들을 3대아승지겁(三大阿僧祗劫) 동안 끊임없이 고쳐나간다.
우리가 보살들에게 얼마나 많은 허물들이 있을까 하고 생각할 때
어떻게 보통 사람인 우리에게 아무런 허물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차이가 무엇인가?
자기에게 많은 허물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깨달은 사람 즉 보살이다.
자기에게 수많은 과실이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 즉 보통사람이다.
보살들은 신이 아니고 자기의 허물을 알고 이를 끊임없이
고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만일 개선하려면 우리들의 허물을 고쳐나갈 뿐만 아니라 아미타 부처님의 서원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우리 운명을 바꾸는 가장 수승한 방법이다.

우리들은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익숙해지기 위하여 매일 이를 독송하나,
이것은 단지 시작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경을 거울삼아 매번 독송할 때 대조하여 반성하고,
우리의 허물을 찾아내도록 활용하는 것이다.
거울에 비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어떤 부분이 더렵혀졌는가를 알아내고 곧 이를 씻어낼 수 있다.
씻어내는 것이 고치는 것이다.
우리는 여태껏 몰랐던 우리 마음의 때를 보기위하여 경을 읽는다.
경은 우리 마음의 어느 부분에 허물이 있는 가를 보여줘 곧 그 허물을 고칠 수 있도록 하게하는 거울과 같다.
그럼으로, 처음엔 경과 친해지지만 다음엔 우리는 그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

수행에 있어서,
먼저 우리는 원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미타 부처님의 48원을 세웠는지, 이원들을 우리 원으로 삼았는지,
그리고 그분과 한마음이 되어 원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과 같아지고 그분의 화신(化身)이 된다.
그분은 우리 자신을 그 분과 같도록 만들고 변화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는 모델이다.
이것이 한 마음, 한 가슴, 한 서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가슴과 서원이 그 분과 같을 때, 우리가 어떻게 정토에 왕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일이 일어나면, 우
리가 다른 사람들이나 상황에 관계할 때 아미타 부처님과 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또 끊임없이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미타불을 염불하도록 격려함을 잊지 않게 된다.

우리의 3업 즉 신업, 구업, 그리고 의업이 아미타 부처님과 같아질 때,
우리는 그 분의 화신이 된다.
우리는 그 분의 본원(本願)을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에 돌아온 것이다.
이 것은 진실하고 유덕한 사람이 되는 것 보다 훨씬 훌륭한 일이다.
원래 우리는 업의 빚을 갚기 위해 이 세상에 환생했으나,
지금은 우리 모두가 우리 서원의 힘에 의하여 이 세상에 오신 아미타 부처님이 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운명을 바꾸는 가장 훌륭하고 수승한 방법인 것이다.

♩..心想曲 이뭐꼬(What is the Ego)

출처 : 선지봉 정사(宣智棒 精舍)
글쓴이 : 정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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