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스크랩] 운명을 바꾸는 공부 / 9

운재 2010. 2. 4. 01:43

원문 : 명대(明代)의 학자 원황(袁黃) 원료범(袁了凡.1533~1606) 선생이 
        자식을 훈계하기 위해 남긴 '요범사훈(了凡四訓)'....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수백년 동안 개운서(改運書)로서 널리 알려진 명저이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9


역경 (易經)은 사람들이 행운을 구하고 불운을 피하는데 (趨吉避兇) 도움이 되기 위하여 쓰여 졌다.
만일 모든 일이 변화의 여지가 없이 예정되어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일을 하리라고 바랄 수 있겠는가?

역경은 고대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성립된 철학서(哲學書)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성인이 되고 유덕한 사람이 되도록 가르친다.
이 책은 수학적 계산에 의하여 이 일을 하고,
나누어 진 그리고 안 나누어 진 선(線)들의 64개 모든 가능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그림들을 이용한다.
여기에는 384 개의 가능한 예언들이 있다.
개인들에 영향을 주는 사소한 변화부터 나라와 전 세계에 영향을 주는 변화들이 이 그림들로부터 연역(演繹)될 수 있다.
이 책은 원인과 결과의 자연스런 진행을 결정하기 위하여 수학을 이용한다.

운곡 선사가 수학을 능가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은 역경의 기법(技法)이 통하지 않는 영역에 속한다.
역경은 상수들에 관하여는 잘 맞다. 역경이 변수들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이것들을 활용하지 못한다.
이 점이 우리에게 공덕을 쌓고 악행을 금하라고 가르친다.
하나의 유덕한 생각은 하나의 플러스이고 하나의 나쁜 생각은 하나의 마이너스이다.
따라서 매일 매일이 단지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일들이다.
만일 변화의 폭이 그다지 크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어느 정도 정확하게 우리의 운명을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공 선생이 요범 선생의 운명을 예언한 것에 해당한다.

20년간 요범 선생은 착하거나 나쁜 생각이나 행동을 늘이거나 줄이지 않고, 그의 운명에 철저히 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착한 생각이나, 불친절한 행동 등 보통 약간의 변화가 있다.
요범 선생은 선행이나 악행 등에 관심이 없이 20년간 한결같았음으로 그의 운명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였다.
만일 변화가 크면 우리들은 상수를 초과하여 “ 행운이 생기고 불운을 면하게 될 것이다. ”
주석(註釋)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 모든 생각과 행동이 변할 수 있음으로,
모든 얻음과 잃음, 기쁨과 고통의 결과도 유연하게 변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결과들은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눌 수 있어,
개인의 행동에 의하여 가기도하고 오기도 한다. ”
상수는 원인이고 변수는 조건이다.
운명을 바꾸는 열쇠는 조건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것이 불교에서 강조 된다: “ 하늘과 땅의 모든 창조물은 조건으로부터 생긴다.
”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변수인 조건으로부터 생긴다.
이 변수를 조절함으로서 우리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원과 목표를 추구하여 놀랍고도 완전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부처님은 경에서 “ 무상(無常), 무아(無我), 열반(涅槃) ” 을 말씀하셨다.
이 원리를 이해함으로서 우리는 현인(賢人), 성인(聖人),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부처가 될 수 있다.

역경의 첫 장에서 “ 선행을 자주하는 집안은 자손에게 남겨줄 여분의 행운이 있다.”고 말했다 (積善之家 必有艅慶).
당신은 이 말을 믿는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역경을 쓴 사람들이 이 세계와 우주의 원인이 상수임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안다.
이들은 또한 조건이 되는 변수가 있음도 알았다.
이 변수를 작은 규모로 조절하여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고 큰
규모로 조절하여 이 세상의 지속적인 안정과 평화를 추구할 수 있다.
역경은 실로 대단하다.
그러나 이 책이 지금 사실상 점치는 책으로 전락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매광희(梅光羲) 선생이 무량수경 서문에 말 했듯이
“ 원래 아미타경은 우리로 하여금 생사의 윤회를 초월하여 부처가 되도록 돕는 가르침 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죽은 사람을 보내는 장례식에서 독송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 아미타경이 이 슬픈 상태로 전락한 것은 역경이 점치는 책으로 전락한 것과 똑 같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서글픈 세태의 반영이다.

역경은 우리에게 행복과 세계 평화와 안정을 얻고,
공덕을 쌓아서 우리 운명을 바꾸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었다.
이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회개하고 개심(改心)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선행을 한 가정이 매우 큰 행운을 가져 그 자손에게 남겨줄 수 있는 것을 믿는지 물어보았다.
요범 선생은 믿는다고 대답했다.
요범 선생이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음은 선근(善根)과 행운으로 좋은 조언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운곡 선사를 만나게 된 것은 적절한 조건이 무르익은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 우리의 선근, 행운 그리고 적합한 조건이 성숙하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 운명을 바꿀 수 없겠는가? ”
우(尤) 선생이 그의 주석에서 말했듯이
“ 성인(聖人)으로부터 좋은 조언을 듣고 그를 비방하는 사람은 악행을 한 것이다.
의심은 기본적인 번뇌의 하나이다. ” 좋은 조언은 이 세상과 그 너머에 있는 성인들의 가르침이다.
후대의 세대들이 이 가르침들을 경전(經典)이라 불렀다. 경전들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은 진리를 말한다.
시간을 초월하는 진리는 과거 수천 년 전과 지금이 똑 같고, 동양이건 서양이건 결코 변하지 않는다.
성인들의 저술과 가르침은 그들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견해에서 나오지 않았다.
만일 그러했다면 이것들이 편향(偏向)되었거나 부적절했을 것이다.
역사는 견해들이 아니라 쌓인 경험들로 이루어졌지만,
경전은 진여본성(眞如本性)에서 나온 진언(眞言)이다.
따라서, 경에 있는 가르침은 절대적인 진리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우리가 이 가르침들을 믿으면 이익을 얻고 좋아지나,
믿지 않으면 대단한 이익들을 놓친다.
이래서 우리는 의심이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 오만, 의심, 그릇된 견해 등
여섯 가지 기본적 번뇌의 하나라고 말한다.
주석은 또한 “ 친절한 조언을 듣고 믿음을 내는 사람은 행운과 공덕이 생기도록 한다.
이 믿음이 행운의 어머니가 된다. ” 라고 말했다.
“ 어머니 ”는 낳아서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행운과 공덕은 성인의 가르침을 믿는 것으로부터 생긴다.
만일 우리가 성인들의 가르침과 말들을 믿을 수 있다면, 이로부터 무한한 행운과 공덕이 비롯함을 발견하게 된다.
요범 선생은 실로 희귀한 사람으로서 선사의 가르침을 듣자 이를 깊이 믿었다.

행운을 닦고 공덕을 쌓아 운명을 초월하다

나는 그분의 조언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존경하는 마음을 엎드려 절하여 바쳤다.
그리고 불상(佛像) 앞에서 크고 작은 내 과거의 모든 과오를 회개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과거에 합격을 바라는 소원을 쓰고 조상과 하늘과 땅에 대한 나의 보은(報恩)의 마음을 보이기 위하여 3
천의 선행을 하기로 맹서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요범 선생이 진실로 스승을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공경함을 볼 수 있다.
그는 “ 스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 라고 가볍게 말하고 잠시 후 다 잊어버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는 불상 앞에서 그의 모든 과오를 숨김없이 회개한 후 진심으로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모든 각자(覺者)들에게 그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그 주석에는 다음으로 “ 다른 사람들이 우리 비행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는 것은 중대한 실수이다 ” 라고 쓰여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과오를 숨기면,
그것들은 놀라운 속도로 증대한다.
만일 우리가 영리하다면, 그것들이 알려지도록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비난 받고 이를 고치게 되면, 우리의 업장(業障)은 점차로 지워진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의 실수를 떠들어 대면 비록 우리가 그들이 말하는 것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남들에게 부당하게 비난받으면 또한 우리의 업장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부당한 비난을 받을 때 우리 자신을 변호하거나 또는 반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변호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과오를 고치도록 돕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죄는 더욱 심각한 것이 될 것이다.
당 태종 (唐 太宗)은 천년 이전 당 나라에 살았었는데 현명하고 교양 있는 위대한 황제로서 기억되고 있다.
왜냐? 그는 그의 결점을 감추지 않았음으로 누구나 그에게 그것에 관하여 말할 수 있었다.
비록 황제였지만 그는 그가 아직 고쳐야 할 허물이 있음을 알았음으로 어떠한 보복도 하지 않았다.
( 만일 그가 보복했다면 아무도 다시 그에게 충고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요범 선생은 비록 공 선생이 그에게 운명이 아니라 했지만 과거 시험 합격을 추구했다.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3000개의 선행을 하기로 서원(誓願)하였다.
우리에게 운명 지워지지 않은 것을 원해서 얻는 것이야 말로 진실로 구해서 얻는 것이다.

내 서원을 듣고 운곡 선사는 나에게 공과격(功過格)을 보여 주고
매일 내가 한 선한 일과 악한 일을 기록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선사는 악한 일은 선한 일을 상쇄한다고 경고했다.

공과격은 공덕과 과오를 기록하는 것으로 명(明)나라 후기에 매우 유행했다.
학자와 불자들이 덕을 닦는데 이를 활용하였다.
큰 스님 연지 대사(蓮池 大師 )는 불교로부터 선행과 악행의 기준을 끌어 낸 “ 자지록 (自知錄) ”을 작성하였다.
이것은 불자들이 악행을 끊고 선행을 닦는데 매우 도움이 되었다.
오랜 기간을 지나며 전해 내려와 현재 우리들이 참조할 수 있는 몇 종류의 공과격들이 있다.
요범 선생은 오백년 전에 살았다.
그의 배경과 생활 방식은 우리들과 매우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롭게 그 공과격을 현대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조정하여 아직도 그 원리들을 지킬 수 있다.
아무도 더욱 현대적인 공과격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 원리들은 유효하다.

선사는 나에게 준제주(準提呪)를 외우도록 가르치셨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집중해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밀교(密敎)에서 준제 보살은 대자비 보살의 화신이다.
왜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경을 독송하는 대신 주를 외우라고 했을까?
주를 외우는 목적은 망념을 없애기 위하여 우리의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주는 산스크리트( Sanskrit )에서 음역(音譯)하였음으로 우리는 그 의미를 따질 필요 없이 소리만 반복하면 된다.
오랫동안 주를 외우면 우리의 마음이 청정해진다.
이렇지 않는 경우에도 최소한 망념은 억눌러진다.
우리가 경을 독송하거나,
주를 외우거나,
부처님 명호를 부르거나 그 목적은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하다.
예로서, 만일 선사가 요범 선생에게 경을 독송하도록 가르쳤으면,
그는 그 의미를 분석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 독송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에 방해가 된다 ).
이래서 그에게 주가 가르쳐 졌다.
불자들이 “ 경을 독송하는 것이 주를 외우는 것만 못하고,
주를 외우는 것이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만 못하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든 이러한 것들이 실제 수행을 강조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받았던 기본 교육을 받지 못 했음으로
“ 양을 잃고 난 후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 ”는 옛 사람들의 충고를 따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우리들이 잃어버린 기본 교육을 매우기 위하여,
수행의 처음 수년간은 무량수경( 無量壽經 ) 외우는데 집중할 수 있다.
배우는데 가장 좋은 시간이 20세 이전임으로 이것은 젊은 사람들에겐 특별히 실용적이다.
만일 우리가 이 경을 기억하여 외울 수 있다면,
우리 남은 인생은 이로부터 이익을 얻을 것이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완전한 지혜이다.
따라서, 경을 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기초가 된다.
만일 우리가 나쁜 일을 그치고 착한 일을 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닦을 수 있다면,
때가 이르면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게 된다.

운곡 선사는 부적(符籍)을 그리는 전문가들이
“ 부적을 그리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그릴 줄 모르면 귀신들이 비웃 는다 ”라고 말한다고 했다.
부적을 그리는 비결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념(無念)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점을 이해하고, 원초적 어두움 후의 고요한 마음에서 첫 획을 긋는다.
그리는 과정에서 모든 망념을 버린다.
이렇게 해야만 부적이 영험(靈驗)이 있게 된다.

부적을 그리는 것은 불교에서 주문(呪文)을 외우는 것과 같은 도교의 오래된 기술이다.
부적을 그리는 비결은 무념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비주 (大悲呪)로 이것을 보여줄 수 있다.
주(呪)를 외어서 성화(聖化)된 대비수(大悲水)는 어떤 사람에는 큰 영험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영험이 없다.
왜냐? 주를 외울 때, 영험을 본 사람은 시작부터 끝까지 단하나의 망념도 갖지 않았다.
만일 주를 외울 때, 하나의 망념이라도 생기면 그 주는 영험이 줄어들거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주가 길수록 성공적으로 외우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능엄주는 매우 영험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이 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왜냐?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주를 외우면서 많은 망념들을 갖게 되고,
단 하나의 망념도 이들의 노력을 무효화(無效化)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원리가 경의 독송에도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정토 수행자로서, 아무런 망념 없이 무량수경 한편을 독송한다면,
이는 경이로운 일이다. 우리의 마음은 전 우주의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들의 마음과 합치한다.
따라서 우리는 청정하고, 평등하고, 진실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을 독송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망념을 갖고 경을 독송하면,
우리의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이 될 수 없다.

이로부터,
우리는 呪(주=주문)가 짧을수록 외우고 집중하기 쉬움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무 아미타불 ”하고 부르는 것은 더욱 짧다.
만일 이것도 너무 길다고 생각하면,
연지 대사 는 단지 “ 아미타불 ”만 부르도록 가르쳤다.
만일 우리가 이 명호를 한 생각도 없이 부른다면,
영험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아미타 부처님에게 팩스(fax)를 보내 그분이 이를 받으신 것과 같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의 망념이라도 더하면 이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心想曲 이뭐꼬(What is the Ego)


..............나무본래자성불

출처 : 선지봉 정사(宣智棒 精舍)
글쓴이 : 정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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