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운명을 바꾸는 공부 / 10
원문 : 명대(明代)의 학자 원황(袁黃) 원료범(袁了凡.1533~1606) 선생이
자식을 훈계하기 위해 남긴 '요범사훈(了凡四訓)'....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수백년 동안 개운서(改運書)로서 널리 알려진 명저이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10
사람이 어떤 것을 위해서 기도하거나 구할 때
또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자 할 때,
단 하나의 생각도 내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 사람은 쉽게 감응(感應)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부처님이나 보살 또는 천상이나 지구의 존재로부터 무언가를 구할 때,
우리가 구하는 것에 감응(感應)이 있으리라는 생각 없이 그렇게 함이 필요하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어떠한 망념도 없이 진정으로 청정해야한다.
이것이 진실하고, 청정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지극히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깨달은 존재에게 간구(懇求)해야 만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마찬가지 원리가 사람들이 조상들의 제사(祭祀)를 모시고 그 위패 (位牌)앞에서 기구할 때에도 적용된다.
청정하지 못한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소용없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제사를 모시는 것이 매우 특별한 행사였다.
예로서, 그 행사를 주제(主祭)한 사람들은 3일 전부터 단식하고 목욕하였다.
그들은 조그만 방에 머물면서 집착을 끊으려고 노력하면서 청정한 마음을 닦았다.
그들은 마치 조상의 영혼들이 참석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제사를 모셨다.
불자들은 이를 “ 관상(觀想) ”이라 부른다. 제사 때 진정으로 조상들을 공경하면,
영혼들이 나타난다.
우리가 도량에서 각자 (覺者)들을 공경할 때,
그들이 함께 있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들의 형상(形像)이 있다하여도 그들이 그곳에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수행자가, 비구, 비구니 또는 재가 불자이건 마음이 진실하고 청정할 때만 각자들이 함께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각자(覺者)로 둔갑한 마귀들이 오히려 더욱 자주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능엄경에 설명되어 있다.
“ 맹자(孟子)는 오래 사는 것 (壽) 과 짧게 사는 것 (夭) 에 차이가 없다고 논했다 ”
처음 생각에 왜 이것들이 같은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생각이 없을 때,
짧은 생명과 긴 생명의 이중성(二重性)도 없다.
짧은 수명과 긴 수명은 완전히 다르다.
왜 이들을 같다고 보는가?
이중성은 망념과 집착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
오직 우리 마음이 청정할 때만 비이중성( 非二重性, 不二 )을 본다.
우주 속의 모든 것이 하나이기 때문에 짧은 수명과 긴 수명은 같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불이(不二)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불이의 경지는 유마힐경(維摩詰經)에 언급되어있다.
정토종에서는 이것이 일심불란으로 알려져 있다.
화엄경에는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이 사는 일진법계(一眞法界)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기초 수준 위에 있는 보살들의 마음의 경계이다.
엄밀하게 분석해 보면,
풍작(豊作)과 흉작(凶作)의 이중성도 없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부자이건 가난하건 현재의 우리 상황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만족한다면,
우리는 안정되어 일을 할 수 있다.
“ 만일 부자가 부자로서 만족하고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데로 만족한다면,
사회는 안정되고 세계는 평화롭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진다 ”라는 말이 있다.
무엇이 행복한 상태인가?
어떠한 망념이나 걱정 또는 고민이 없는 것이다.
만일 가난한 사람이 지금 그의 상황이 운명의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 사람 또한 만족할 것이다.
이 좋은 예가 20세기 초에 일어났다.
강소성(江蘇省) 한 마을의 어떤 사람이 낮에는 밥을 빌고 밤에는 오래된 폐사(廢寺)들에서 잤다.
이대로 그는 만족했다.
그의 아들이 사업에 성공하여 부자가 되어 유력(有力)인사가 되었는데 사람들로부터 훈계(訓戒)를 받게 되었다:
“ 당신이 어찌 이렇게 불효자식일 수 있는가?
당신이 이렇게 부자이면서 아버지가 계속해서 빌어먹게 할 수 있는가? ”
그 아들은 이것을 듣고 부끄러워져 사람을 여러 곳에 보내 아버지를 찾아 집으로 대려와 모셨다.
그러나 아들집에서 한달을 산 후, 아버지는 다시 거지 생활을 하려고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 차라리 아들집에서 행운을 즐기며 사는 것이 더 낳지 않을까? ”하고 물었다.
그는 대답하였다: “ 나는 그곳에서 매우 불편했다.
지금, 나는 낮에 내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고 갈 수 있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가는 것을 즐길 수 있다. 밤이면 어디든 내 집을 만들 수 있다.
이처럼 자유롭게 사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 집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 나에게는 고통이었다. ”
그는 그의 분수에 만족하며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는 부(富), 욕망 (色), 명예(名), 음식(食), 수면(睡) 등의 5욕에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행복했고, 청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여 바쁠 때,
이 세상을 하나의 유희(遊戱)로 보고 방관자로서 남기를 더 좋아했다.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지혜와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모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고 충족한 생활이 반드시 부나 사회적 지위와 같은 뜻이 아님을 모르고 이를 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운명을 이해하고, 중생의 바람에 부합하도록 적응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덕(有德)한 행위들을 기뻐해야할 필요가 있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들의 일생이 행복하고 충족해질 것이다.
빈(貧)과 부(富) 사이에 이중성이 없음을 이해할 때,
우리의 마음은 높건 낮건 현재의 우리의 사회적 지위에 만족할 수 있다.
또한 오래 사는 것과 짧게 사는 것에도 이중성이 없다.
이렇게 이해하면 길건 짧건 우리의 수명에 만족할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삶과 죽음이다.
따라서 단명(短命)과 장수(長壽)는 유리(有利) 불리(不利)와 ,
손해 이익의 모든 상황들을 포함한다.
이것은 모든 상황에 순응함을 말한다.
상황이 좋건 나쁘건 모든 것이 명백하고 필연적으로 됨으로 우리는 온전히 편안할 수 있다.
우리들은 복을 받고 얻고 대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참된 삶이다.
진정한 행복은 큰 지혜와 수행 없이는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마음을 안정시켜 그들의 운명을 재창조 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부도덕하게 처신하여 더욱 어리석어지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짓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종종 어리석은 사람들을 “불쌍한 사람들” 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수행이 어떤 수준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운명이 변할 것이다.
이 변화는 우리가 쌓은 공덕과 하늘로부터 감응을 구하는 것에 달려있다.
수행할 때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알고,
마치 병을 고치는 것처럼 이 허물을 고치려고 결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재창조되기를 기다리며 수행하지만 이 이것은 하루 밤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들은 게으르지 않고 자신감을 갖고 부지런히 개선하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알기 위 하여는 미혹되지 않고 깨어있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수행이란 3업에서 그릇된 생각, 말, 행동들을 고치는 것이고,
이 허물들을 고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채택하는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갖지 못하도록 예정된 어떤 것을 바라는 생각이나 어떤 보상을 원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의 선행에 관한 보상의 빠른 수확을 바라는 것은 망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이 장애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오직 수행만 물을 뿐 수확을 물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열심히 수행하기만 하면 수확은 자연히 따라온다.
왜 번거롭게 끊임없이 그걸 바라야 하는가?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것, 이것이야 말로 수행의 참된 길이다.
단지 그릇된 행동을 끊고 선행을 하는 데만 집중하면,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건 다 얻을 수 있다.
우리가 구할 때, 우리가 얻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행 공덕이 우리의 성덕(性德)과 상응(相應)하지 않음으로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원하는 것만 얻게 된다.
구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우리의 성덕과 상응하여 나타난다.
실제로 요범 선생이 얻은 것은 수행공덕이다.
그것은 아직 성덕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여전히 구했기 때문에.
처음엔 그가 학문적 명성과 관직을 원했고 다음엔 자식을 구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 졌다.
만일 그가 소망하는 단 하나의 생각도 갖지 않았다면,
만일 그가 오로지 수행만 하고 공덕을 쌓았다면, 모든 것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는 장수를 구하지 않았지만 운명지어진 것보다 오래 살았다.
그는 53세에 죽을 운명이었지만, 74세까지 살았다.
만일 우리가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만 찾는 것을 그치고,
순탄한 일생, 충분한 먹을 것,
안전한 거처와 적절한 의복 등 분별 있는 소원만 가진다면 우리는 이익을 얻을 것이다.
작은 집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소박하게 그리고 안락하게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낭비에 치러야 할 대가를 모르고
사치스러운 물건들을 소유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인상을 주려한다.
그들은 얻는 것보다 더 많이 잃는다.
그 대신 만일,
우리가 우리의 행운을 남과 나누어 가지면 우리의 행운은 공덕의 축적이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수행하여 100세대까지 이어갈 충분한 공덕을 쌓았다면,
우리의 자손들이 행운을 누릴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정말로 영리하고 지혜롭다면,
우리는 확실히 우리의 행운을 남과 나눌 것이다.
그러므로 인내심을 가져야한다.
왜 마침 좋은 때에 스스로 오는데 행운이 빨리 오길 바라는가?
“ 이 수준에서는,
실질적 배움과 지혜의 수행인 무심(無心)의 내재적(內在的) 본성에 이르는 경계가 될 것 이오. ”
운곡 선사는 말씀하셨다: “ 나는 당신이 아직 무심의 경계에 이를 수 없음을 알고 있소.
그러나 당신은 준제주 (準堤呪)를 암송 회수를 세지도 않고 연속적으로 그리고 간단없이 외우는 수행은 할 수 있소.
당신이 더 높은 수준인 부단히 잊지 않은 경계에 이르면,
당신은 외우면서 외우지 않고 외우지 않으면서 외우는 경계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이 더 이상 망념을 갖지 않을 때, 주(呪)는 영험이 있을 것 이오 ”
지혜를 배우고 수행하는 것이 참된 지식이다.
내재적 본성(本性)이 “본래의 경계(境界)로 돌아가는 것이다 ( 返本還源 ).”
우리 본래의 참된 성품이 나타나는 이것은 보통 사람의 경계 (境界)가 아니다.
본래의 경계가 진정한 행복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법희(法喜)로 충만하고 고통을 떠나 행복을 얻는 것 ( 離苦得樂) 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 구하는 것이다.
“ 원만한 수행과 원만한 성취 (圓修 圓證 ) ” 로 부르는 이 방법을 운곡 선사가 가르쳤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계(戒)정(定)혜(慧)를 따르는 3학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게 한다.
화엄경에 “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 ( 一卽一切 一切卽一 )” 라고 설해졌다.
수행의 요체는 간단없이 그리고 다른 생각이나 방법을 섞지 않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암송 회수를 셀 필요가 있을까?
운곡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그러지 말고 단지 끊임없이 암송하라고만 하였다.
많은 옛 현인들이 수행자들에게 처음에는 회수를 세어가며 암송하도록 요구했다.
왜냐? 그들이 우리처럼 개을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겐 하루에 일만 번씩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것처럼 하루의 목표를 갖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목표를 채우는 것이 개으름의 나쁜 습관을 퇴치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암송 회수를 세지 않으면 수행하기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러나 요범 선생처럼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에겐 암송 회수를 계산할 필요가 없다.
그에겐 그렇게 하는 것이 생각들을 섞는 것이 된다.
그의 수행은 진실한 공부였고 정진이었다.
따라서 그는 간단없이 그리고 다른 생각이나 방법을 섞지 않고 수행하였다.
모든 방법들이 같다.
어느 것도 다른 것과 다르지 않다.
성취는 오랜 기간 오직 한 방법으로 깊이 들어감에 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대개 독경(讀經)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경전을 독송하건,
주(呪)나 부처님 명호를 외우건 우리는 청정하고 평등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수행하면,
진실로 그로부터 이익을 얻을 것이다.
“ 무심(無心) ”의 경지가 관건(關鍵)이다.
이것은 어떤 망념이나 분별심(分別心)이나 애착을 갖지 않는 것이다.
비록 요범 선생이 운곡 선사와 참선한 3일간 어떠한 망념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는 아직 무심의 경지에는 이르지는 못했다.
그는 집중이 아닌 믿음을 이용하여 번뇌를 억눌렀다.
그는 모든 것이 운명지어 졌다고 믿었다.
그는 인과(因果)를 믿었다.
따라서 선사는 그에게 다음 수준으로 나아가는 길, 집중(集中,定)의 수행을 가르쳤다.
준제주(準堤呪)를 암송하는 것은 끊임없이 집중의 수행(修定) 을 하는 것이다.
망념과 애착으로부터 벗어남으로서 우리의 진성 (眞性)이 나타난다.
부처님은 자주 “ 법이자연(法爾自然) ” 을 말씀하셨다.
정토수행자는 이것을 일심불란이 진실로 그리고 완벽하게 성취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 수행의 목표이다.
이것이 “ 외우면서 외우지 않고, 외우지 않으면서 외우는 ”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종종 “ 외우는 행위에 집착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외우면서 외우지 않고, 외우지 않으면서 외우는 것 ” 이라고 설명된다.
우리는 부처님 명호를 외우나 경전을 독송하거나 이렇게 한다.
우리가 무량수경을 집착 없이 독송할 때,
먼저 끊임없는 아미타불 염불의 경지에 그리고 다음에 일심불란의 경지에 이른다.
비록 방법들이 다를지언정 원리와 목표는 같다.
우리가 무심의 경지에 이르면 암송은 우리의 제2의 천성이 되어 자연스레 감응(感應)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성취에 3가지 수준이 있다.
상위의 수준은 깨달음의 일심불란 (理一心不亂)이고 ,
중위의 수준은 잊지 않은 일심불란 (事一心不亂)이고
하위인 첫 수준은 끊임없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 功夫成片 )이다.
우리의 성취가 어떤 수준에 이르렀을 때 만족할 수 없다.
그리하면 우리가 더 향상하는 것에 지장이 되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염불의 상위 수준에 이르면 우리는 마음대로 이 세상을 초월하고,
언제고 원할 때 떠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언제고 우리가 가기를 원하면, 아미타 부처님이 우리를 서방 정토로 인도하러 오실 것이다.
비록 우리가 이 수준의 성취를 이루어 편안하게 죽을 수 있어도
이 세상에 더 오래 머무는 것이 최선(最善)이다.
왜냐?
우리는 무량수경에서 이 사바세계에서 하루 수행하는 것이 정토에서 백년 수행하는 것과 같다고 읽는다.
우리는 이곳에 우리의 인욕을 수행하기 위하여 머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정토로 가는 것을 격려하기 위하여 머문다.
우리들이 왕생할 수 있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도 같이 그곳에 왕생할수록 도울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좋은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돕고 가르치고 격려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수행하고 다른 사람들도 같이 하도록 고무할 수 있다면 우리의 공덕은 완전해 진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깨달은 분들이 우리에게 베푼 깊은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
♩..心想曲 이뭐꼬(What is the Ego)
......................나무본래자성불 - - -!!!